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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 BUZZ
 STAT 리포트

‘국민 유격수’ 박진만의 위대한 마침표

2015-10-26 월, 18:49 By KBReport

‘시간이 지나도~ 대한민국 최고 유격수~ SK 와이번스 박진만~ 최고의 박진만~’.

2015년 10월 26일.

그의 응원가 한 소절처럼 우리 나이 불혹에도 ‘대한민국 최고 유격수’라는 별명을 달고 뛰었던 박진만이 은퇴를 선언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장 위대했던 유격수, 박진만. 
‘유격수’와 ‘우승’, 그리고 ‘마침표’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그의 족적을 되짚어보자.

‘국민 유격수’ 박진만. 
그보다 ‘유격수’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선수가 있을까?
(사진: SK 와이번스)

유격수 GG 5회 - ‘유격수’ 그 자체였던 사나이

유격수는 수비력이 중요시되는 포지션이다. 수비력이 중요시되지 않는 포지션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 중에서도 유격수 포지션은 특별하다. 2루수와 함께 가장 많은 아웃카운트를 처리해야 하는 포지션이기에, 화려한 공격력보다는 안정된 수비력에 더욱 초점이 맞춰진다. 그런 점에서 박진만은 유격수의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다. 

박진만은 화려한 공격력과는 다소 거리가 먼 선수다. 프로에서 뛴 20시즌 중 3할 타율을 기록한 것은 단 2차례에 불과하고, 150안타 이상을 때린 시즌은 단 한 차례도 없다. 두 자리 수 홈런을 6차례 기록했지만 장거리 타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두 자리 수 도루를 단 2차례 기록한 다리도 스피드와는 거리가 멀었다. 

유격수 최초 홈런왕을 차지한 장종훈, 유격수로 타율 0.393에 84도루를 기록한 이종범, 유격수 최초 40홈런을 돌파한 강정호 등 엄청난 공격력을 자랑했던 유격수들과 비교한다면, 그의 공격력은 다소 초라해보인다.

하지만 그의 수비력은 달랐다. 빠른 타구판단능력을 바탕으로 한 폭넓은 수비범위, 정확한 송구능력은 리그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리고, 이 압도적인 수비력은 그에게 장종훈(유격수 GG 2회)도, 이종범(유격수 GG 4회)도, 강정호(유격수 GG 4회)도 이뤄내지 못한 유격수 골든글러브 5회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안겨줬다. 덕분에 그는 그 누구보다도 ‘유격수’라는 세 글자가 잘 어울리는 선수가 될 수 있었다.

한국시리즈 6회 우승 – ‘우승’이 제일 쉬웠어요

박진만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비단 ‘유격수’ 뿐만이 아니다. 그는 그야말로 우승을 밥먹듯이 했던 선수. ‘우승이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선수가 있다면, 바로 박진만이다. 

박진만은 프로에서 무려 6차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8회 우승에 빛나는 김정수, 7회 우승의 김성한, 이순철 등 해태의 레전드들에는 다소 미치지 못하지만, 박진만은 수천 명이 몸을 담았던 KBO에서 10손가락 안에 드는 ‘우승의 달인’이다. 

특히 박진만이 한 개의 팀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두 팀에서 각각 4회, 2회씩 우승을 따냈다는 점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두 개 이상의 팀에서 6차례 이상 우승을 따낸 것은 KBO 역사상 단 6명밖에 이뤄내지 못한 대기록. 박진만은 위 명단에 이름을 올린 6명 중 한국시리즈 MVP(2006시즌)를 차지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박진만의 우승 이력은 이 뿐만이 아니다. 박진만은 프로에서뿐만 아니라, 각종 국가대표팀에도 수차례 선발되어 국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박진만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자신의 우승 이력에 화려함을 더했다. 

특히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고영민과 합작한 더블플레이는 야구 팬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명장면이다. 

대기록의 실패 – 아쉽지만 위대한 그의 ‘마침표’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5회 수상, 한국시리즈 6회 우승, 아시안게임 우승, 올림픽 우승. 
이처럼 화려한 이력을 가진 선수임에도 박진만의 은퇴 선언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20시즌 동안 그가 만들어온 수많은 대기록들이 더 이상 새로 쓰여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박진만이 무릎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2016시즌을 뛸 수 있었더라면 세울 수 있었을 대기록들은 상당히 많다. ‘야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동시에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이기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특히 2000경기 출장은 KBO 역사상 단 7명밖에 이뤄내지 못한 기록이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박진만의 무릎 부상으로 인해, 박진만의 바람, 그리고 팬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박진만의 통산 경기수는 결국 ‘1993’에 묶이게 되었다.

하지만, 박진만은 이러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쿨하게 ‘마침표’를 선언했다. “남은 7경기의 아쉬움은 코치로서 7번째 우승반지를 끼는 것으로 대신하겠다”는 말과 함께. 

(사진: 삼성 라이온즈)

‘유격수’ 박진만의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었지만, ‘코치’ 박진만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계민호 기자 (kbr@kb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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