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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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 BUZZ
 STAT 리포트

'못다핀 꽃 한 송이' 비운의 프로야구 스타들.

2017-02-07 화, 23:04 By 이정민
프로야구 개막이 50일 앞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시즌이 성큼 다가옴에 따라 선수들은 저마다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개막을 앞둔 현 시점에서 선수들에게 다가오는 시즌 이루고 싶은 목표를 물으면 모두 지난 해보다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처음으로 프로 무대를 밟는 신인 선수들부터 은퇴를 앞둔 불혹의 노장 선수들까지 다가오는 시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똑같다. 실력을 향상시키고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프로 선수들의 기본적인 자세이며 가장 큰 성취감일 것이다.

대부분 선수들이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유니폼을 벗으며 프로 생활을 정리하곤 한다. 하지만 절정의 기량을 뽐내야 할 시기에 유니폼을 벗은 선수들도 있다. 이들은 뛰어난 가능성을 가졌었지만 불의의 사고 또는 병마로 인해 안타깝게도 우리 곁을 떠났다. 듣는 것만으로도 야구 팬들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그런 이름들이다.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에 빛났던 '아기 호랑이' 김상진

해태 타이거즈는 짧은 기간동안 9번의 우승을 일궈내며 프로야구 역사상 최강의 팀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대부분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마다 마지막에 마운드를 지켰던 투수는 선동열이었다. 그가 해태가 왕조로 군림하던 기간내내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던 그가 떠난 후 해태의 마지막 우승 당시 마운드에는 21세의 젊은 청년이 있었다. 96년 진흥고를 졸업하고 바로 해태에 입단한 투수 김상진이 그 주인공이었다. 

▲ 97년 한국시리즈 최종전, 완투승을 거두던 김상진의 모습. ⓒ KIA 타이거즈

김상진은 입단 당시부터 뛰어난 제구력으로 타이거즈의 미래를 책임질 투수로 호평을 받았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96년 입단 첫해부터 9승(123.2이닝 4.29)을 거두며 선발진에 합류했다. 이듬해인 97년에는 더 안정감있는 모습을 보이며 역시 9승(147.2이닝 3.60)을 기록했다. 거기다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완투승을 기록하며 직접 팀의 우승을 책임졌다. 해태 팬들은 선동열은 떠났지만 이대진과 김상진이 이끄는 앞으로의 해태를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 프로 3년차까지의 김상진의 기록. 아쉽게도 더 이상 기록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출처=야구기록실, KBReport.com) ⓒ 케이비리포트

그러나 10년은 마운드를 책임질 것 같았던 김상진은 너무나도 일찍 그곳을 떠났다. 98년까지는 건재하게 마운드에서 활동했지만 그 해 말에 생긴 목 통증이 그를 괴롭혔다. 단순한 부상인줄 알았던 통증의 원인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곳에 있었다. 

시즌이 끝난 후, 피를 토하며 쓰러진 김상진은 검사 결과 목뼈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정밀 검사 결과였다. 건강한 야구 선수였던 김상진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것이었다. 목뼈에 종양 역시 위에서 전이된 것이었다. 

김상진은 마운드에서 유독 위기에도 담담한 표정으로 꿋꿋한 모습을 보였던 투수였다. 말기 암 판정을 받은 후에도 바로 입원해 항암치료를 받으며 꿋꿋하게 투병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드시 마운드에 다시 돌아가겠다고 팬들에게 약속도 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상진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999년 6월 10일, 어쩌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운드를 지킬수도 있었던 투수가 병마로 인해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해태의 후신인 기아는 지금까지도 그의 기일에 유니폼에 검은 띠를 착용한다.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난 '아기 호랑이' 김상진을 기리기 위해서다.

'비운의 투수' 해태 김대현

1999년 안타깝게 김상진을 떠나 보낸 해태는 10여년 전에도 좋은 투수를 안타깝게 잃은 적이 있다. 1988년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투수 김대현의 이야기다. 그는 86년 전주고와 원광대를 졸업하고 입단한 투수였다. 입단 첫 해에는 해태 마운드가 워낙 두터웠던 탓에 별다른 기회를 잡지 못하고 2군과 1군을 오갔다.

그러나 김대현은 좌절하지 않았다. 2군에서 구위를 다듬은 후, 이듬해인 1987년 2.78의 평균자책점으로 9승 3세이브를 따내며 1군 풀타임 투수로 거듭났다. 또한 가을무대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OB와 맞붙었던 플레이오프에서 2번의 선발승을 거두며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 주역이 되었다. 한국시리즈에서도 1차전과 4차전 선발로 출전해 제몫을 하며 팀 우승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김대현은 육성의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 2군에서 실력을 키워 1군에서 활약한 드문 케이스였다.

그는 이듬해인 88년에도 변함없이 활약하며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 특히나 선발 출장 비중이 올라간 것이 고무적이었다. 지난 해 가을야구에서 좋은 기억이 있던 김대현은 또 한번의 우승을 꿈꾸며 가을을 준비했다. 해태는 예상대로 한국시리즈에 올라갔다. 하지만 김대현은 가을 잔치에 초대받지 못했다. 김대현이 한창 가을야구를 준비하던 8월 27일, 교통사고를 당하며 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 3년동안 김대현의 기록. 부진했던 86년을 견뎌내고 87년부터 강팀 해태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출처=야구기록실, KBReport.com) ⓒ 케이비리포트

너무나도 갑작스런 사고로 유망한 투수를 잃고 만 것이다. 하지만 김대현은 떠났지만 많은 것을 남겼다.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해태 선수들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다 잡을 수 있었다. 해태는 1988년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한번 정상에 오르며 김대현을 우승 트로피로 위로했다. 또한 그의 죽음은 최동원에게 프로야구선수협회 결성을 주도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프로야구선수협회는 여러번의 몸살을 앓은 후 결성되어 현재는 선수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로 자리잡고 있다.

최초의 영구결번 OB 김영신

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 사례는 누구일까? 국보급 투수 선동열(해태)보다 먼저 영구결번이 된 사례가 있다. OB 베어스의 54번 김영신 선수의 번호가 최초의 사례다. 해당 선수가 이룩한 뛰어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구결번이 된 이후 사례와는 다른 안타까운 경우였다.

시범종목이었던 84년 LA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참가했던 김영신은 당시만 해도 유망한 포수였다. 하지만 비운은 그가 포수였다는 점과 이듬해 입단한 팀이 OB베어스였다는 것이다.

▲ 김경문 감독(NC)과 김태형 감독(두산)의 OB 포수 시절. OB는 포수왕국이라 불리며 뛰어난 포수들을 매 시즌 배출해냈다. ⓒ OB 베어스 팬북
 
'포수 왕국'이라 불렸던 베어스는 원년부터 지금까지 포수 걱정을 해본적이 없을 정도로 풍족한 포수팜을 자랑했다. 김영신이 입단하던 85년 당시에도 김경문과 조범현이라는 국가대표급 포수들이 안방을 지키고 있었다. 더군다나 김영신의 포지션인 포수는 1군에 고작 두 자리만 허용되는 등용문이 좁은 포지션이었다. 

▲ 2년동안 김영신의 기록. 통산 33 타석만을 소화했을 정도로 출전 기회가 적었다.
(출처=야구기록실, KBReport.com) ⓒ 케이비리포트 
출전 기회가 줄어든 김영신은 현실을 비관한 채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1군에 나설 기회가 적었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한강에 투신한 것이다. 국가대표 출신의 포수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OB는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등번호 54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 이렇게 안타까운 최초의 영구결번 사례가 생긴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 임수혁

롯데팬이면 이맘때쯤 꼭 생각나는 선수가 있다. 90년대 마해영과 함께 마림포를 결성해 롯데의 해결사로 활약했던 임수혁 선수가 떠난 날이 2010년 2월 7일이기 때문이다. 

임수혁은 장타력을 앞세워 큰 경기에서 고비마다 시원한 홈런포를 날리며 롯데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선수였다. 95년 플레이오프에서 이상훈을 상대로 때려냈던 역전 홈런과 99년 플레이오프에서 임창용을 상대로 때려냈던 동점 홈런은 아직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 임수혁은 뛰어난 장타력을 앞세워 결정적인 순간마다 활약하며 롯데의 스타로 자리매김 했다. ⓒ 롯데 자이언츠

입단 후 공격형 포수로 롯데의 주전을 굳히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수비가 좋은 강성우에 국가대표 출신 최기문이 트레이드로 롯데에 유니폼을 입으며 주전 경쟁이 거세졌다. 거기에 임수혁은 지병인 부정맥과 무릎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소화하기 힘든 상황이라 주로 대타로 출전하곤 했다. 

하지만 2000년년들어 마음을 다잡은 임수혁은 시즌 초반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롯데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10경기동안 3개의 홈런포를 몰아치며 좋은 타격감을 뽐냈다. 주변 동료들에게도 "밀레니엄 2000년에 좋은 활약을 할 것 같다."는 그의 말이 현실이 되는듯 했다. 하지만 그 해는 임수혁에게 최고의 해가 아닌 비극적인 해가 되고 말았다.

4월 18일 경기에서 1루에 출루해 있던 임수혁은 후속 타자 우드의 안타로 2루까지 도달했다. 롯데 팬들은 스코어링 포지션에 안착한 임수혁이 이어진 후속타로 홈을 밟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임수혁은 갑작스럽게 그라운드에 쓰러지고 말았다. 지병인 부정맥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심폐소생술이 필요했던 상황이지만 당시 경기장에는 의사가 대기하고 있지 않았고 안타까운 시간만이 흘러갔다.

▲ 7년간 임수혁이 남긴 기록. 장타력을 갖춘 그의 합류는 롯데 타선에 큰 힘이 되었다.
(출처=야구기록실, KBReport.com) ⓒ 케이비리포트

쓰러진 2루주자 임수혁은 병상에 누워 10년이 가까운 시간을 버텼지만 2010년 2월 7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떠난 겨울이 돌아올 때마다 많은 야구 팬들이 임수혁을 그리워하며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임수혁이 떠난 후 롯데는 긴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4년 연속 최하위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롯데는 임수혁이 뛰었던 90년대에는 92년,95년,99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에는 단 한번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임수혁이 동점홈런을 날리며 가져온 한국시리즈 티켓이 지금까지 마지막 초대권이었다.

임수혁의 통산 홈런 갯수인 47호를 이어나가겠단 각오로 47번의 등번호를 택한 강민호는 이제 팀의 최고 스타로 자리잡았다. 임수혁이 그랬던 것처럼 롯데 팬들은 선수들이 또 한번 가을의 뜨거운 드라마를 써주기를 기대하고 있다.